저는 미국이 CBDC를 막는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단순히 공화당의 반규제 성향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H.R. 1919이 하원을 통과한 과정과 GENIUS Act의 구조를 함께 놓고 보니, 이건 규제 완화가 아니라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미국은 국가가 직접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는 막되, 민간이 만드는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은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두 트랙 전략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디지털달러를 막은 법, H.R. 1919의 진짜 의미
2025년 7월 17일, 미국 하원은 219대 210이라는 표 차이로 Anti-CBDC Surveillance State Act(H.R. 1919)를 통과시켰습니다. 법안 이름만 보면 감시 반대 인권법처럼 들리지만, 실제 내용을 뜯어보면 금융 구조를 겨냥한 정밀 타격입니다.
법안의 핵심은 세 가지 금지로 구성됩니다. 연방준비은행이 개인 소비자에게 직접 계좌를 제공하거나 소매형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상품을 출시하는 것을 막고, 의회 승인 없이는 재무부와 연준이 CBDC를 발행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여기서 CBDC란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디지털 법정통화, 즉 정부가 만든 디지털 현금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미국 관할권 안에 있는 기업과 개인은 외국 중앙은행이 발행한 CBDC도 보유할 수 없습니다.
이 마지막 조항이 제가 가장 주목한 부분입니다. 중국의 e-CNY(디지털 위안화), 나이지리아의 eNaira, 바하마의 Sand Dollar 등 이미 운영 중인 해외 CBDC를 미국 관할 기업이 보유하는 것 자체를 금지합니다. 이 조항은 단순한 국내 금융정책이 아니라 글로벌 디지털 통화 주도권 싸움의 성격을 띱니다.
법안 발의자인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 Tom Emmer는 프로그래머블 머니(Programmable Money), 즉 지출 기한이나 사용처가 코드로 제한되는 디지털 화폐가 정부의 금융 감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2022년 캐나다 트럭 기사 시위 당시 정부가 시위대의 은행 계좌를 동결한 사건,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 사회신용 시스템과 연동한 디지털 위안화 운용 사례가 반면교사로 거론됐습니다.
상업은행 로비의 힘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행연합회(ABA)는 2025년 4월 지지 서한을 공개하며, 연준이 직접 소비자 계좌를 운영하면 은행 예금이 빠져나가고 대출 기능이 마비된다고 명시했습니다. 소매형 CBDC에 이자를 지급하는 구조가 생기면 기업과 개인이 시중 은행 예금 대신 연준 계좌에 자금을 넣을 유인이 생기는데, 이 경우 은행 예금 기반이 무너집니다. 상업은행 입장에서는 생존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제가 이 법안을 처음 읽었을 때 한 가지 착각을 했습니다. '스테이블코인도 막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H.R. 1919은 국가가 발행하는 소매형 디지털 화폐만 타겟으로 하고, 민간 발행 스테이블코인, 토큰화 예금, 블록체인 기반 결제 인프라는 전혀 건드리지 않습니다. 이 구분이 이 법안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 금지 대상: 연준 발행 소매형 CBDC, 외국 중앙은행 CBDC 보유
- 허용 대상: 민간 스테이블코인, 토큰화 예금, 도매형 은행간 결제 실험
- 통과 배경: 공화당 주도 + 트럼프 행정부 서명 의지 + ABA 로비 삼각 동맹
- 상원 변수: 외국 CBDC 예외 조항 신설 가능성, 타 금융 법안과의 병합 리스크
GENIUS Act와 스테이블코인: 달러 패권의 가장 미국적인 방식
H.R. 1919가 국가 주도 디지털 달러를 막는 법이라면, GENIUS Act는 민간 주도 디지털 달러에 제도의 울타리를 두르는 법입니다. 두 법안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목표를 향합니다. 달러 생태계의 디지털 확장입니다.
GENIUS Act는 2025년 미국에서 통과된 최초의 연방 차원 스테이블코인 발행 프레임워크입니다. 여기서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이란 법정통화, 특히 달러에 1:1로 가치를 고정한 민간 발행 디지털 자산을 말합니다. USDT, USDC 같은 것들이 대표적입니다. 이 법은 발행사에게 단기 국채 등 적격 준비자산을 1:1로 보유하도록 강제하고, 자금세탁방지(AML) 및 제재 준수 의무를 부과합니다.
제가 이 구조를 처음 접했을 때 1960년대 유로달러 시장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미국은 자국 규제 밖에서 유통되는 달러 예금, 이른바 유로달러(Eurodollar)를 직접 통제하지 않고 묵인했습니다. 해외에서 달러 수요를 만들어내는 이 시장이 미국 입장에서는 이익이었기 때문입니다. 스테이블코인도 비슷한 논리입니다. 미국이 직접 발행하지 않아도, 민간 발행사가 전 세계에 달러 연동 디지털 토큰을 유통하면 자연스럽게 달러 수요가 늘어납니다.
브루킹스 연구소 Nellie Liang과 시카고대 Brent Neiman의 분석에 따르면(출처: Brookings Institution),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준비금으로 미국 단기 국채를 대량 매입하게 되면 2030년까지 최소 4천억 달러에서 최대 2조 3천억 달러의 추가 국채 수요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 숫자가 제게는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부채 규모 때문에 흔들리는 달러 신뢰도를 방어하는 데 스테이블코인 생태계가 실질적인 완충 역할을 하는 구조입니다.
물론 장밋빛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브루킹스 보고서는 스테이블코인이 시중 은행 예금을 흡수할 경우 지역 중소기업 대출 기반이 약해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기존 통화시장펀드(MMF)에서 자금이 이동하면 국채 순수요 증가 효과도 상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해외 제재와 자금세탁 추적에 활용하는 코레스폰던트 뱅킹(Correspondent Banking), 즉 국가 간 자금 이동을 처리하는 중개 은행 네트워크의 영향력이 스테이블코인 확산으로 약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점은 국가 안보 문제이기도 합니다.
독일 중앙은행(Bundesbank)이 참여한 연구(출처: Deutsche Bundesbank)에서는 가계 설문을 통해 디지털 유로 수요를 측정했는데, 평상시에는 은행 예금 일부를 CBDC로 대체하는 '느린 이탈'이 예상되고, 금융위기 시에는 CBDC가 훨씬 편리한 도피처가 되어 '빠른 이탈'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 연구는 미국의 논의와 정반대 지점에서 같은 불안을 확인합니다. CBDC는 도입 방식과 한도 설계를 잘못하면 금융 안정성을 오히려 흔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이 CBDC 대신 규제된 민간 스테이블코인을 선택한 것이 단순히 이념적 선택만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제 판단으로는, 지금 중요한 것은 스테이블코인 허용 여부가 아닙니다. GENIUS Act 울타리 안에서 규제를 받게 된 민간 발행사들이 어떤 준비금을 어떻게 운용하느냐, 그리고 그 준비금이 미 국채 시장과 글로벌 금융 지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입니다. 이 흐름을 읽어내는 시야가 지금 시점에서 훨씬 더 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H.R. 1919이 통과되면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에도 영향이 있나요?
A. 직접적인 영향은 없습니다. 이 법안은 연준이 발행하는 소매형 CBDC와 외국 중앙은행 CBDC만을 규제 대상으로 합니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같은 민간 암호화폐는 이 법안의 적용 범위 밖에 있고, 기존 규제 프레임워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테이블코인 역시 별도의 GENIUS Act 트랙에서 다뤄집니다.
Q. 국내 기업이 해외 CBDC를 보유하면 정말 처벌받을 수 있나요?
A. 법안 현재 문구 기준으로는 그렇습니다. 미국 관할권에 속하는 기업과 개인, 미국 모회사의 해외 자회사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운용 범위가 상당히 넓습니다. 다만 상원 심의 과정에서 소액 면제 조항이나 일시 보유 예외가 추가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최종 법안이 확정되기 전까지 코레스폰던트 뱅킹 관련 거래를 꼼꼼히 점검해두는 것이 현실적인 대응입니다.
Q. GENIUS Act가 통과됐으니 USDT, USDC 같은 스테이블코인은 더 안전해지나요?
A. 제도적 투명성은 높아집니다. 발행사가 연방 라이선스를 받고 준비자산을 공개해야 하므로, 이전보다 신뢰 기반이 강화됩니다. 다만 준비금 구성이 단기 국채 중심으로 재편되는 만큼, 국채 시장의 급격한 변동이 발생할 경우 스테이블코인 환매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은 여전히 구조적 리스크로 남아 있습니다.
Q. 다른 나라들은 미국의 이 전략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나요?
A. 브루킹스 연구소 보고서에서도 지적했듯,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이 전 세계로 퍼지면 외국의 통화 주권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유럽, 중국, 신흥국들이 자국 CBDC 개발을 가속화하는 모습입니다. EU의 디지털 유로 프로젝트, 중국의 e-CNY 국제화 시도가 모두 이 맥락에서 읽힙니다. 미국의 두 트랙 전략은 달러 패권 유지에 유리하지만, 글로벌 통화 긴장을 높이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결론
H.R. 1919와 GENIUS Act를 함께 놓고 보면, 미국의 선택이 꽤 일관된 논리 위에 서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국가가 직접 발행하는 소매형 디지털 달러는 상업은행을 위협하고 정치적으로 감시 도구 논란을 불러옵니다. 반면 민간이 발행하고 규제 울타리 안에서 운용되는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수요를 늘리고, 그 준비금으로 국채를 흡수하며, 정부가 직접 책임지지 않아도 됩니다. 유로달러 시대의 논리가 블록체인 위에서 재현되고 있는 셈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 변화는 눈에 띄게 드라마틱하게 오지 않습니다. 법안 이름이 바뀌고, 준비금 기준이 조정되고, 상원 심의 과정에서 정의가 조금씩 달라지는 과정 속에서 실제 금융 지형이 조용히 재편됩니다. 지금 중요한 건 CBDC가 막혔느냐 아니냐의 이분법보다, 규제 테두리 안에 들어온 민간 디지털 달러가 미 국채 시장과 글로벌 결제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계속 추적하는 일입니다.
참고: https://www.brookings.edu/articles/stablecoins-after-genius
https://www.bis.org/publications/working-paper-1280-cbdc-and-banks-disintermediating-fast-and-s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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